명량해전 12척 vs 333척의 싸움......
글쓴이 : 이태윤   조회(2147)   등록일 : 2005-07-27 오후 2:20:00

명량해전 12척 vs 333척인데 이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이순신 장군님이시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또한 김현국님처럼 불멸 폐인인지라 주말 9시 이후로는 음주가무뿐만 아니라 집밖을 안나가...아니 못나갑니다...^^

세계 4대 해전은

ㅡ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제독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
ㅡ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ㅡ 1592년 거북선 2척을 앞장세워 승리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ㅡ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등이 있는데요.....

어째서 명랑대첩이 세계 4대 해전에 들어가지 못한 것 일까요??

명랑대첩은 13척의 군선으로 330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한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기적적인 대첩인데.. 왜 들어가지 못한 것 이죠??

===> 여러가지 이유가 있던데 제 생각에는

세계해전의 기준은 서양처럼 전면전으로 싸웠냐 아니면 아시아에서 사용되는 매복 기습등등의
책략을 사용했다면 그것을 제외하냐입니다
명랑해전은 쇠사슬을 이용한 책략을 사용했기에 세계해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인거 같습니다.

*** 그럼 명량해전에 대해 알아보겟습니다...좀 깁니다..인내심을 가지고 보시길....

*명량대첩(鳴梁大捷)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

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말단 부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앞에 나타난 권율은 마치 그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영웅을 죄인으로 몰아 백의종군시키고 있음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

해 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

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

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구국의 영웅을 죄인으로 몰았던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해졌다. 상대는 수백 척의 대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에게는 12척의 함선이 있을 뿐이었다. 제독은 이 12척의 전함(판옥선)의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전 함선을 거북선과의 절충형으로 개조하였다.

즉 갑판의 벽을 높여 병사들이 적의 조총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왜인들은 이 배도

거북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배를 움직일 병사와 전투병들이 필요했다. 이 때는 이미 배에 딸린 병사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또 군량미도 구해야 했고, 탄약과 피사체도 모두 부족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의무만 지워줬을 뿐 쌀 한 톨 지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이 모든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이렇게 출발한 이순신 일행은 8월 5일, 곡성읍에 도착하여 고산 현감 최진강으로부터 신병들을

인수받았다. 8월 6일, 옥과에 접어들어서니 구례가 왜병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문에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옛 부하 이기남(거북선 돌격대장), 정사준 형제, 군관 조응복,

양동립 등을 만나 일행에 가담시켰다.

8월 7일, 아침 일찍 옥과를 출발하여 순천으로 향하던 중 부대가 해산되어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

가던 전라 병사 이복남의 부하들을 만나 이들을 모두 수군으로 편입시켰고, 또 이들로부터 많은 군마

와 병기들도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8일,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 옥구 군수 김희온 등을 얻고 해질 무렵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에 도착하니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무능한 관리들이

도망가기에 바빠 적군에게 큰 도움이 될 군기 창고를 파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들의 실책으로 이순신은 많은 병장기와 장편전 등의 피사체를

얻을 수 있었다.


8월 9일, 순천을 떠나 낙안으로 가니,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순천 부사 우치적과 김제 군수 고봉상

등이 가담하여 왔다. 그들은 곧 국창(國倉)이 있는 보성 조양창으로 향하였다. 초저녁에 도착하여보

니 그곳에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창고가 봉인된 채 있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조선 군관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많은 보급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빈손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조선 해군 재건은 최소한의 군병과 병기 그리고 군량미를 확보

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궁색한 모습이었지만 적의 공격을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순신은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보성 등 330km를 돌며 신병 1천 명과 군량미 1개월 분,

그리고 많은 전투용 병기들을 거두어들여 최소한 한차례의 해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 두어야 할 점은, 이 많은 병참품들을 왜군보다 불과 하루 정도

앞질러 이순신이 먼저 거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모조리

왜병들 손에 넘어가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아도 선비의 나라 조선이 얼마나 병법에 무지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8월 20일, 드디어 이순신은 갑판 개조를 끝낸 12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직접 지휘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6일, 기다리고 있던 일본 해군의 척후선 8척이 이진의 60리

거리까지 접근하여 왔다. 원균의 패전 이후 이리저리 도망만 친 12척의 함대였다.

따라서 이순신의 지휘하에 거두는 첫 승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발견한 이순신은 슬그머니 함대를 어란진(於蘭津)으로 옮겨갔다.

한편, 조선 수군의 패잔선 무리가 이진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일본의 척후선단이 추격해 와 보니,

조선의 패잔선단은 겁에 질려 어란진으로 도망쳐 버렸다. 3도 연합 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용맹한

군함들을 보고 도망치는 꼴이 가엾을 정도였다.

이 때까지 일본군들은 도망치는 12척의 선단을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8월 28일 오전 6시, 왜선들은 조선의 패잔선들을 잡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이순신 제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조선 해군의 승선원 태반이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들이었고, 그 중에는 물을 무서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도 올려줘야 했고, 또 실전을 통하여 전투 경험도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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