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을 기억하시는지...곽재성
글쓴이 : KT강준호   조회(5233)   등록일 : 2008-06-27 오후 8:20:00


야구기사보다가 얼핏 우측 측면에 있는 사진이 눈에띄어 클릭해보니...
아련한 기억속에 있던 곽재성 선수...
한창 야구잘했던것으로 기억했는데 롯데에서 뭘했는지 기억이 안나더군요...
기사를 읽다보니 안타깝기도하고 말로만 듣던 롯데의 문제점도 알게되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는 기사라 올려봅니다...
비운(?)의 에이스 곽재성선수에게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면서...



비운(悲運)의 사전적 의미는 ‘순조롭지 못하거나 슬픈 운명’이다.
은퇴를 눈앞에 뒀거나 부상으로 선수생명에 위기를 맞은 왕년의 스타에게 흔히 ‘비운의 선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 전· 현직 3명의 투수가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고교시절 혹사 때문에 프로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투수’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비운의 투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혹사’는 진실이 아닌 진실을 가리기 위한 보호색에 불과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고교시절을 제외하고 한 번도 정상을 밟지 못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스포츠 춘추>에서는 1편 곽재성 전 롯데 투수, 2편 김건덕 전 부경고(구 경남상고) 투수, 3편 이정호 현 우리 히어로즈 투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야구인생이 과연 ‘비운’이었는가 살펴볼 예정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어떤 투수였는가 기억을 공유하자는 게 글의 의도다.

오랜만이다. 친구야. 잘 지냈나? 내야 매일 똑같지. 가게 운영하고 뭐 있겠노. 그런데 우짠 일이고? 뭐? 낼 기억하는 야구팬들이 있다꼬? 농담하지 마라. 경남상고 교명도 부경고로 바뀐 지 좀 됐재. 경남상고 곽재성 기억하는 사람 동문 빼곤 거의 없다. 농담 아니라꼬? 어허, 이거 그럼 억수로 영광인대(웃음).

니 요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억수로 잘 던지는 거 알재? 작년 시즌 끝나고 찬호가 귀국했을 때 우리 가게 들렸잖아. 내가 폼을 조금 봐줬는데 그기 도움이 많이 됐는갑대(웃음). 내같은 무명 은퇴선수 인터뷰 하면 뭐하겠노. 그냥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나 편하게 하지 뭐. 친구야. 사투리는 니가 알아서 좀 바꿔도. 사투리 안 쓰려고 억지로 노력하면 생각도 부자연스럽게 변한데이. 이해하재?

1+2=1

원래 태어난 곳은 서울이야. 우리 둘다 1973년 소띠아이가. 아버지가 컨테이너 사업을 시작하는 통에 5공 때 부산으로 내려왔지. 어렸을 때 꽤 잘 살았던 기억이 나. 수영장 딸린 집에 살았으면 말 다한 거지. 야구는 언제부터 했냐고?

내가 국민(초등)학교 때 살던 아파트에 말이야. 빨간색 무슨 유니폼 입고 다니는 애들이 있었어. 그렇지. 초등학교 야구부 애들이었어. 하루는 친구들이랑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는데 그 애들이 자기들이랑 한 게임하자는 거야. “우린 야구선수랑은 안 해”하고 외면했지.

그런데 계속 한번 해보자는 거야. 하도 귀찮게 조르니까 나중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한판 붙었지.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내가 걔네들을 죄다 삼진으로 잡았다니까. 전혀 내 공을 못 치더라고. 그런데 누가 아파트에서 그걸 봤던 모양이야.

그 아저씨가 지관구 배정국민학교 야구부 감독이셨어. 그분이 우리 부모님을 설득해서 내가 야구를 하게 만드셨어(웃음). 그때야 다 고만고만하니까 두각을 나타내고 말고가 없었어. 대천중학교에 진학하고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 대천중 선배가 누구였는지 알아? 3학년 강상수(LG 스카우트), 2학년 문동환(한화)이었어. 당시 (강)상수형이 우리들 사이에선 ‘야구의 신’으로 통했다. 왜냐고? 지금 상수형 키가 그때 키랑 똑같았거든(웃음). 중학생들이 보기에 그 큰 덩치로 공을 던지니 얼마나 빨라 보였겠어.

상수형이 선발로 나가면 (문)동환형이 마무리로 뛰고 점수 차가 꽤 벌어지면 내가 던지는 식으로 투수진이 가동됐지. 아, 동기생으로는 차명주가 있었어. 그때 전국에서 대천중이 꽤 잘하는 팀으로 소문이 났을 거야. 뭐? 그런데 왜 부산고나 경남고로 진학하지 않고 경남상고(현 부경고)에 입학했냐고? (한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아픔이 있다.

뭐, 다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그때 두 학교에서 내보고 ‘오라’ 했다고. 그런데 내가 두 학교 가운데 한곳에 가게 되면 동기생들이 갈 곳이 없는 거야. 너도 알잖아. 보통 운동부 있는 학교는 운동 잘하는 선수가 입학하는 조건으로 동기생 2명을 더 뽑아주잖아. 그래봤자 어차피 1+2=1이지.

(손을 저으며)아니야. 누가 시켜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대천중 감독님한테 “친구들이랑 같이 가겠다”고 했어.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 실은 중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난거야. 이거 숙소가 필요한데 부산고, 경남고는 옷 갈아입을 만한 라커는 있어도 먹고 잘 수 있는 기숙사가 없었거든. 반면 부산상고, 경남상고는 기숙사 시설이 완비돼 있었어. 고민 끝에 경남상고행을 선택했지.

1991년 기적의 2관왕, 그러나 무관의 에이스

(경남상고)입학하고 나서 솔직히 실망했지. 야구 잘한다 싶은 선배들도 별로 없고 경기만 하면 지는 거야. 난 체격이 좋아서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어. 임종수, 안명성, 우승진 등 동기들 실력도 참 좋았어. 1학년생끼리 2, 3학년 선배들이 졸업하면 우리가 고교대회 전관왕 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니까. 정말 훈련을 지독하게 많이 했거든. 아,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른 침이 나올 것 같다.

그때 경남상고 사령탑이 안병환(LA 다저스 한국 담당)감독님이었다고. 그분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말도 마라, 진짜 대단했다. 29살에 감독이 되셨으니 얼마나 혈기왕성하고 욕심이 많았겠어. 거기다 얼마나 독했는지 몰라.

우리들이 야구를 알 때까지 그리고 실력이 늘 때까지 거의 쉬지 않고 훈련을 시켰는데 난 겨울에 하루 1천500개씩 공을 던질 때도 있었어. 엄청나다고? 거의 미친 짓이었지. 그런데 고3이 되니까 이게 묘한 거야. 거짓말처럼 내가 던지고 싶은 곳에 공을 던질 수 있게 됐다니까. 그렇지. 제구가 잡힌 거야.

그런데 안 감독님도 어느 감독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그게 누군지 아나? 우째 알았노. 맞다. 김성근(SK)감독님이야. 김 감독님이 태평양 돌핀스에 계실 때 2년 동안 동계훈련을 부산에서 했거든. 그때 안 감독님이 김 감독님한테 많이 배웠던 모양이야. 안 감독님이 김성근식 야구를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하려고 노력했지.

나중에 나를 비롯해 몇몇 선수들이 “안 감독의 혹사 때문에 야구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선수”로 지목됐지만 안 감독님한테 야구를 배울 때만은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어. 야구감독으로서도 나를 잘 가르쳐주신 것 같고.

내가 악바리였냐고? 당연하지. 당시 경남상고가 툭하면 100일 합숙훈련을 했거든. 하루 종일 운동장에 뒹굴다 잠자리에 누우면 ‘픽’하고 쓰러지게 마련이야. 그런데 난 애들 다 잘 때 슬며시 일어서 새벽까지 스윙연습을 했어. 무슨 투수가 스윙연습이냐고? 친구야. 그때 내가 팀의 4번 타자 아니었냐.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4번을 쳤잖아. 그때는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지만 ‘투수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했어. 대신 타격은 힘은 좋은데 정확성이 부족해서 연습이 필요했거든.

가끔 안 감독님이 술 한 잔 하시고 기숙사에 오셨다가 새벽까지 스윙연습을 하는 날 보곤 했어. 그럴 때면 ‘천하의 악바리’ 안 감독님이 “너무 훈련을 많이 해도 좋지 않다”고 말렸다니까. 왜 그렇게까지 했겠냐. 당연하지. 내가 성공하고 그래서 고생하는 우리 부모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는 길밖에는 없다고 믿은 거지.

역시 노력은 배신하는 법이 없더라. 1991년 대통령배대회 우승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막 뛴다. 누가 뭐래도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어. 무명의 경남상고가 강호 신일고를 꺾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그때 신일고 멤버 기억나? 조성민(MBC ESPN 해설가), 강혁(SK), 백재호(한화 코치), 설종진(우리 히어로즈 1군 매니저) 등 고교 최강 멤버들이었지.

신일고랑 결승에서 딱 맞붙었는데(목이 탄 듯 물을 마시고 나서). 이상하게 긴장이 안 되는 거야. 어찌나 자신감이 붙는지 ‘이거 오늘 쉽게 가겠는데’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아니나 다를까 결승에서 내가 4안타 무실점으로 신일고 타선을 완전히 틀어막았잖아. (안)명성이랑 (조)준혁이가 홈런 쳐서 우리가 신일고에 5-0 압승을 거뒀지. 우승하고 나서 학교가 난리가 났지. 그도 그럴 게 경남상고 창단 이래 첫 전국대회 우승이었거든. 스포츠신문 1면 톱에 실리고 아주 정신없었어. 나도 혼자 3승을 거둔 덕분에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받았지.

이때만 해도 주변에서 우리보고 그랬어. “대통령배대회 우승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우리도 사실 긴가민가했지. 그런데 1달 있다가 열린 청룡기대회에서 우리 실력이 ‘우연’이 아니란 걸 알게 됐지 뭐야. 청룡기대회 결승 상대가 어디였냐고? 이번에도 강팀이었어. 호남 명문 광주일고였어. 내가 준결승전까지 많이 던져서 그날은 일단 선발로 차명주가 나갔어. 여차하면 내가 마운드에 올라간다는 게 팀의 작전이었지.

그런데 광주일고 애들이 (차)명주 느린공에 계속 말리더라고. 당시 광주일고 방망이가 장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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