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덕, "신은 내게 재능과 불행을 줬다"
글쓴이 : KT강준호   조회(3234)   등록일 : 2008-07-03 오후 2:43:00




김건덕, "신은 내게 재능과 불행을 줬다"

고향이 원래 부산인가.

혹시 ‘영도’라고 아나? 왜 영화 <친구>에서 아이들이 수영하는 장면 나오지 않나. 거가 부산 영도구 청학동이라고 내 고향 동네다.

운동은 육상부터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이면 뭐든 좋아했다. 부산 봉학초등학교 다닐 때 육상 투척종목 선수로 뛰었다. 대신초등학교 야구부 감독님이 내가 투척하는 걸 본 모양이다. 1주일 동안 매일 집에 찾아와가꼬 “쟤는 야구를 시켜야한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야구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부모가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때 가정형편이 무척 어려웠다. 부모님이 가능하면 나나 동생이 운동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술을 워낙 좋아하시다보니까 1주일 동안 매일 소주, 맥주를 사들고 오는 감독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 같다(웃음). 감독님 가고 아버지가 “정말 야구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고개를 끄덕이니까 “이왕 하는 거 열심히 안하면 다시는 안 시킨데이”하셨다. 그길로 대신초교로 전학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2학기가 끝날 즈음이었다.

어찌 보면 야구를 조금 늦게 시작한 셈이다.

잘난 척 하려는 건 아니고 기존에 야구하던 애들보다 늦게 시작했어도 훨씬 잘했다. 그 애들보다 공도 빨랐고 방망이도 잘 쳐서 금세 투· 타의 중심이 됐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정도였으니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라.

아버지가 자갈치 수산시장에서 일 하셨다. 워낙 술을 좋아하셔서 월급 가운데 대부분이 술값이셨다고 한다. 어머니께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주셨다. 밖에 나가시면 모든 이들이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집에서는 반대였다. 부모님이 한 번 싸우시면 선풍기 날아가고 뭐 날아가고. (멋쩍은 표정으로) 다음날 어머니가 부서진 가전제품을 사오시면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파손되는 식으로 두 분의 다툼이 잦았다.

때론 그런 환경이 사람을 더 크게 성장시킬 수도 있다.

맞다. 어릴 때부터 ‘난 반드시 야구선수로 대성해야한다’, ‘야구로 쇼부(승부)를 봐야한다’는 식의 다짐을 끊임없이 했다. (목소리에 힘을 주며 ) 당시 내겐 야구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음, 어쩌면 내겐 야구가 사법고시 같은 존재였는지 모른다.

대신중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다.

당시 178cm로 키가 무척 컸다. 체격도 좋았고. 그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 같다. 그즈음 던지기 시작한 슬라이더도 꽤 평이 좋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처럼 고교 감독님들이 나만 보면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노히트노런 투수의 등장

경남상고 안병환 감독(사진 맨 왼쪽 등을 보인 사내)이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당시 경남상고는 지독한 훈련으로 "선수들 눈빛부터가 다르다"는 평을 들었다

1992년 대신중을 졸업한 뒤 경남상고(현 부경고)에 입학했다.

사실 우리 때 경남상고는 중학교 야구선수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학교는 아니었다. 1991년 (곽)재성이형이랑 (차)명주형 있을 때 전국대회 2관왕(청룡기, 대통령배대회)을 차지하면서 이름이 알려졌지 부산고, 경남고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남상고에 입학한 이유가 있다면 뭘까.

경남상고 안병환 감독님이 매일 대신중을 방문하셨고 오실 때마다 내게 야구용품을 주시는 등 많이 아껴주셨다. 무엇보다 부산지역 학교마다 라인이 있다. ‘대신중은 경남상고(부경고)’, ‘부산중은 부산고’, ‘토성중은 경남고’ 하는 식으로 연결이 돼 있었다. 당시 경남상고 동창회 회장님이 아버지를 만나 “(건덕이)야구부 회비 면제에 장학금도 주겠다”며 호의를 베푸시기도 했다.

당시 경남상고는‘애들을 잡는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엄청난 훈련량을 자랑했다.

경남상고에 진학하고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하루 종일 러닝만 했다. 와, 고마 미치는 줄 알았다. 1주일이 지나 체중계에 올랐더니 몸무게가 6kg나 빠졌지 뭔가. 그래도 예전 선배들 말 들으면 우린 양호한 편이었다. 선배들 말로는 “토하면서 뛰었다”고 하더라(웃음). 아무래도 안병환 감독님 야구철학이 “야구를 잘 하려면 몸부터 제대로 만들어야한다”였으니까 강훈련을 한 게 당연했지 싶다.

당시 경남상고 멤버가 딱히 화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강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경남상고 선수들 가운데 괜찮은 선수는 지금 유신고 코치로 있는 동기생 양종성과 1년 선배였던 전 현대 이학균 선수 정도였다. 저와 (양)종성, 학균 선배 셋이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팀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학년 때부터 투수였나.

간혹 마운드에 서기도 했지만 주로 우익수를 맡았다. 그때는 나나 팀이나 방망이가 무척 좋았다. 1학년 때인가. 대통령배대회에서 군산상고랑 맞붙었을 때 우리가 3, 4, 5, 6번 4타자 연속 홈런을 친 적이 있는데 기억하나. (고개를 끄덕이자) 그때 6번 타자가 바로 나였다.

2학년이 된 뒤 투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화랑대기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성근(현 SK) 감독님께서 야인이실 때 여기저기 고등학교를 방문하시면서 선수들을 지도하셨다. 안 감독님과도 친분이 돈독해 우리 학교(경남상고)에도 오신 적이 있다. 1주일 동안 지도하셨는데 그때 나도 김 감독님께 투구폼을 교정받았다. 지금도 화랑대기대회를 코앞에 두고 김 감독님이 안 감독님한테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뭐라고 했나.

“안 감독, 좀 있으면 화랑대기대회 치르지? 쟤 선발로 올리라. 일낼 거야.” 그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뜻이었을까.

김 감독님이 보시기에 내 투구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실제 화랑대기대회에선 어땠나.

바로 우승했다(웃음). 우리가 내리 5경기를 이기면서 우승했는데 그 가운데 4승을 내 혼자 거뒀다.



1994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준우승에 오른 뒤 찍은 기념사진. 사진 맨 뒤 중앙에 있는 이가 김건덕이다

정작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1993년 대통령배대회 때부터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당시 대통령배대회 부산지역 예선전은 단판 승부가 아니라 1, 2차 리그전으로 치러졌다. 6개교가 1차 5경기, 2차 5경기씩 총 10경기를 치러 종합성적을 합산해 그 가운데 제일 성적이 좋은 2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내가 10경기 모두 등판해 던졌다. 그 가운데 경남고를 상대로….

경남고는 예나 지금이나 강호다. 난타라도 당했나.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나이 때 야구선수에겐 패배가 승리의 전주곡이다. 괜찮다.

그게 아니라 그때 경남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1점 차로 뒤진 경남고의 9회말 공격이었다. 아마 무사 2루였을 거다. 그때까지 안타, 실책 없이 볼넷 2개만 내주고 있었다. 노히트노런 의식을 했냐고? 당연하지 않은가(웃음). 아, 그런데 경남고 타자로 손인호 선배가 나오지 뭔가.

프로에서야 손인호가 ‘투수들의 벗’이 됐지만 아마추어 때만 해도 ‘투수들의 공적’이었다.

맞다. 그즈음 지역신문 기자가 내게 그런 질문을 했다. “어느 타자가 가장 상대하게 어렵냐”고. 주저 없이 경남고 손인호 선배를 꼽았다. 진짜 그때는 어디 던질 곳이 없는 완벽한 타자였다.

강타자 손인호를 상대로 주무기인 슬라이더를 던졌을 듯싶다.

그게 화근이었다.

화근이라면 제대로 맞았다는 뜻인데.

슬라이더를 ‘딱’ 던졌는데 손인호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다. 타구가 바로 내 옆을 지나 중견수쪽을 향해 굴러가는데 속으로 ‘아이고, 안타인갑네’했다. 그때였다.

손인호가 1루로 가다 넘어지기라도 했나.

그게 아니라 지금 LG에 있는 채종국 형이 그때 유격수였는데 슬라이딩 캐치로 타구를 잡는 게 아닌가. (송구하는 시늉을 하며) 그리곤 잽싸게 일어나 1루로 던졌는데 간발의 차로 아웃이었다. 사실 손인호 선배는 그때도 다리가 느렸다(웃음).

노히트노런은 중학교 때 이미 달성하지 않았나. 고교 때도 1차례 더 달성했고.

대신중에 다닐 때 상인천중 상대로 1번 했고, 경남고한테 1번 더(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그런 대기록 달성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당신의 슬라이더를 꼽는 이들이 많다. 선동열(삼성 감독)이후 ‘최고의 슬라이더’라는 찬사가 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손끝의 감각이 좋아선지 슬라이더를 참 잘 던졌다. 슬라이더만 던지면 거의 스트라이크가 됐다. 가끔 ‘백도어 슬라이더’도 던졌는데 그것도 잘 들어갔다. 무엇보다 동기생 포수 양종성 덕이 컸다. 종성이가 블로킹을 참 잘했다. 스트라이크 낫아웃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니까. 글마 아니었으면 택도 없었다.

또래 선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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